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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fie082 2025. 3. 13.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흐루쇼프(러시아어: Ники́та Серге́евич Хрущёв, 러시아어 발음: [nʲɪˈkʲitə sʲɪˈrgʲejɪvʲɪtʲɕ xruˈʃɕof] ( 듣기), 문화어: 니끼따 쎄르게예비치 흐루쑈브, 1894년 4월 15일~1971년 9월 11일)는 소련의 군인, 정치인이다. 1953년 소련의 지도자였던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하자 소련 공산당 제1서기로 등극했고, 1956년부터 1964년까지 소련의 여러 요직(要職)을 거쳤다. 국가원수 재임 초기에는 스탈린 격하 운동을 명령하고, 소련 우주 프로그램을 추진해 소련의 첨단 과학을 육성하는 일련의 성과를 거두었다. 자신의 정책이 성공했다고 판단한 후르쇼프는 자신감을 얻었고, 경제 성장을 촉진하면서도 시민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여러가지 개혁을 야심차게 추진했으나 그가 시행한 정책은 시민들에게도 관료들에게도 인기가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대부분 실패하였다. 특히 그의 전문성 결여와 독선적인 행보는 소련 공산당의 민주집중제와 집단지도체제 원칙을 크게 훼손하며 기존 당직자들에게도 불만을 일으켰고, 결국 1964년 모든 권력에서 쫒겨나며 강제로 은퇴하게 되었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1894년, 러시아 제국 쿠르스크현에 위치한 칼리놉카에서 태어났다. 젊었을 때 그는 금속 가공 노동자로 일했으며, 러시아 내전 동안에는 정치지도원으로 일하면서 정치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후 라자리 카가노비치의 후원 아래 소련 내에서 지위가 높아지기 시작했으며, 그 동안 흐루쇼프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대숙청을 지지하면서 수천 명의 체포를 도왔다. 이에 1938년 스탈린은 흐루쇼프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통치하도록 하였고, 흐루쇼프는 우크라이나에서 숙청을 계속했다. 러시아에서 '대조국전쟁'으로 불리는 독일-소련 전쟁에서 다시 정치지도원으로 일하며 스탈린과 장군들 간의 소통을 담당했다. 전쟁 중 스탈린그라드에서 방어에 참여했으며, 이는 그가 평생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던 일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스탈린의 측근으로 모스크바에 가기 전 우크라이나에 돌아왔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의 죽음은 권력 투쟁을 촉발하였고, 이 투쟁에서 흐루쇼프는 서기장의 자리를 차지하며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1956년 2월 25일, 흐루쇼프는 제20회 소련 공산당 회의에서 스탈린의 대숙청을 규탄하고 이전보다 소련에서 덜 억압적인 사회를 만든다는 《비밀 연설》을 하였다. 그러나 일반 시민을 위한 그의 국내 정책은 특히 농업에서 크게 실패했다. 또한 흐루쇼프는 국방을 미사일에 의존하여 재래식 무기들의 대규모 삭감을 실행하였으나, 쿠바 미사일 위기 등 흐루쇼프의 집권기에 냉전은 절정에 달했다. 집권 초기인 1950년대 흐루쇼프는 수에즈 및 시리아 위기, 1960년 U-2기 사건 등의 성공적인 대처와 1957년 스푸트니크 1호 발사 성공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열렬히 지지받았다. 그러나 1960년대 초반에 정책의 결함과 쿠바 미사일 위기의 대처로 그의 인기는 줄어들었다. 때문에 흐루쇼프의 반대파들은 대담해졌고 결국 힘을 키운 반대파들은 1964년 10월 흐루쇼프를 축출했다. 하지만 이전의 소련 권력 투쟁과 달리 흐루쇼프는 모스크바에 아파트와 다차를 연금으로 받아 안정적으로 생활했으며, 그의 긴 회고록은 서방으로 밀반출되어 1970년 일부 출판되었다. 1971년, 흐루쇼프는 심장 마비로 사망하였다